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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숱한 사람들.
어떤 이는 짧은 만남으로도 내내 그리움으로 참숯처럼 단단히 남기도 하고, 어떤 이는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는 불쾌함으로도 남는다. 어떤 이는 말과 글에 기대를 하고 만났다가 그 사람됨에 실망하는 씁쓸함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말과 사람이 그대로 하나구나 고개가 숙여지는 배움으로 남기도 한다. 관계라는 것이 일방적일 수 없으니, 상대방에게 남게되는 내 모습 또한 그러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제일 어려운 일이 사람과 맺는 관계라 했다. 적은 세월을 살았다 말 할 수 없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나는 사람 때문에 아프면서도 사람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을 버리지 못한다.

12월 문턱을 넘어선 겨울바람이 제법 맵차다.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합정역에 내려 마포청년회를 찾아가는 길.
약도에 그려진 골목길을 한참 걸어가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관계자와 전화통화를 하고서야 갔던 길을 되돌아와  사무실을 찾아갈 수 있었다.
전기난로 하나 없는 공간에 나무책상이 ㄷ자로 놓여있고 흰 종이에 검은 매직으로 써서 붙인 글자.

' 마포청년회와 함께하는 하종강의 노동강좌'

아, 아직도 이렇게들 일을 하는구나.
20년전의 어느 허름한 운동단체 공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앞선 강좌를 마치고 오시는 길이라며 조금 시간이 지체될 것 같다고 젊은 친구가 말을 전한다.  강의를 기다리고 있는 열명 남짓한 사람들은  2, 30대 초반 정도나 되었을까 아무리 보아도 우리 만큼 나이 든 사람은 없어보였다.  벽면에 붙여진 이런저런 활동 사진을 눈으로 살펴본 후,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꺼내어 표지를 바라본다.

추석무렵 TV를 치운 후  몇 주가 지난 휴일 저녁이었다. 뭐 읽을만한 책이 없냐고 그가 물어왔다.  촘스키 저서와 새사연 도서를 부랴부랴 읽고 넘겨준 지가 몇 일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른 책을 찾는 것이다.  내가 느린 것인지 그가 빠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TV를 안보니 독서량이 늘었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 이 책은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돼. 사무실에 두고와서도 안돼고.  근래 내가 만난 책 중에서 가장 감동 받은 글인데, 이건 손으로 쓴 글이 아니고 가슴으로 쓴 글이야.  읽으면서 몇번쯤 콧날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양심과 사회적 감수성을 의심해봐야 할 거라고 생각해. 나 이거 하 선생님 서명 받아서 우리 애들에게 가보로 물려줄 거거든. "

평소 내가  그다지 인심 좋은 서평을 하지않는 터라 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몇 일 후 그가 하선생님 강연을 듣고싶은데, 어디 아는데 없느냐고 물어온 것이다.  이참에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수소문을 해 봤지만, 늘 현장을 바쁘게 날아다니는 일정인지라 마땅히 우리가 함께 할 자리가 없어보였다. 그렇게 두어달쯤 지났을까, 노동과 꿈 홈페이지에 마포청년회 이름으로 강연 공지 게시글이 실린 것이다.  당연히 없는 시간이라도 새로 만들어서 갈 참이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30여분이 지나 하선생님이 찬공기를 묻히며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학생교복 같은  검은색 더플코트에 청바지 차림. 하하, 여전하시구나, 마음이 편해지며 속으로 유쾌한 웃음이 머금어졌다. 혹시라도 50대의 어떤 차림, 혹은 교수님 같은 모습이라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너무 젊은 차림이었다. 하하

선생님은 쉬지도 않고 바로 모니터를 연결해 사진을 띄우며 강연을 시작 하셨다.  
50만원짜리 수입을 자청하며 사는 인권 변호사 이야기에서부터 서구 유럽의 노동조합 교육의 실재, 그들의 노동자와 노조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 그에 반한 우리 사회의 몰지각성과 비정상적인 정서를 견주어 이야기 하셨다.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친근하게 만나는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예정된 2시간을 넘기고,  시계를 곁눈질하던 선생님이 하려던 이야기를 포기하려 하자 앉은 자리쪽에서 " 이야기 해 주세요~" 애교섞인 합창이 들려왔고, 그 소리에 선생님은  "그럼 지금부터 강의 시간은 잊기로 합시다" 하며 흔쾌히 손목시계를 풀어 책상 위에 내려놓으셨다. 이어지는 열정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그 후로도 3시간을 더했으니, 5시간을 빡빡하게 채운 특강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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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교나 세련됨이 없어도 내내 사람의 눈길과 마음을 붙드는 힘, 그건 세월과 가슴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KTX 여승무원 이야기를 할 때, 부당하게 해고된 어린이집 교사 이야기를 들려줄 때, 해고노동자와 함께 먹던 짜장면 이야기를 할 때, 80년 김의기 열사의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사연을 이야기 할 때 콧날이 붉어지며 목이 메이고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목소리가 잦아지는 강사를, 나는 처음 보았다.  20년을, 그것도 험하디 험한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강의를 해 온 50대의 남자 어른이, 사법연수원이며 대학강단이며 이 사회의 엘리트들을 앉혀놓고 노동법을 강의하는 교수님이 속마음이 그대로 뚝뚝 묻어나는, 눈물 일렁이는 무방비 상태의 얼굴일 수 있음이 충격이었다.  나도 눈물이 났다.


앉은 자리 그대로 김밥과 음료, 떡볶이가 차려진 뒤풀이.
쉴 틈도 없이 청중의 질문은 이어졌고 강사는 어떤 질문에도 진지하고 진솔하게 긴 답변을 했다. 나도 말하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저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말을 하는 일은 대단히 힘겨운 노동이다. 두 시간 수업을 떠들고나면 나 같은 사람도 허기가 지곤하는데, 저녁도 못먹고 적어도 7,8시간을 연달아 하는 강의라니...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었기에 죄송스러움을 무릅쓸 수 밖에 없었다.


" 87, 89년 민주화투쟁, 노동자 대투쟁의 찬란했던 시절이후, 90년대 초반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갔는데요, 사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사상이라든가 신념의 혼란이 심하게는 거의 공황 상태였지요. 그후 사람들은 운동이라든가 정치에 대해 절망적이거나 냉소적이 되어갔구요. 개중에는 변절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 시기가 참으로 외롭고 어려웠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라는 시간동안 한결같을 수 있었던, 선생님을 지탱이게 한 힘이 무엇이었을까, 그점이 내내 궁금했습니다. "


내 말을 찬찬히 듣던 선생님이 '흩어진 정도가 아니라 거의 보이질 않았죠'라고 중간에 말을 덧붙이셨다. 당시의 쓰라림이 느껴졌다.  사상이나 신념을 논하는 것보다 선생님께는 매일매일 치뤄내야할 노동현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해야 할 일상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갈등과 혼란의 시간이 적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느 대목에선가 이어지던 이야기가 가슴을 울렸다.


" 송영수라는 후배가 있어요. 부산지역노조를 처음 만들었고, 어떤 노동운동에서도 그 친구가 선두에 서는, 대단한 사람인데요. 제가 처음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게된 것이, 그 후배가 나보다 먼저 검거가 되어 고문 끝에 제 이름을 얘기하게 되거든요.....그 후배는 온갖 고문을 받은 끝에 방광, 신장의 실핏줄이 다 터져서 몇 일을 피오줌을 싸기도 했지요. 지금은 하루에도 서너번씩 투석을 해야만 살 수가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종이 한 장 들 수 없을 정도로 그로기 상태가 되어버려요. 그런데도 사무실에 투석기를 가져다놓고 새까맣게 탄 입술로 여전히,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고있지요.... 예전에 그 친구가 투쟁이론을 취합정리한 적이 있는데, 주체사상을 비판하며 김일성은 나의 이론을 배우라고 호기를 부리기까지 했어요. 그 문구를 보며 검사마저 웃었다는 거죠. 그렇게 대단한 이론가인 그 후배가 20년이 지난 어느 날 제게 묻더라구요.

'형은 20년 동안이나 이 길을 버리지 않고, 무엇때문에 여기까지 왔어? ' 그래서 제가, '나는 세계관이 변하지 않았거든' 이렇게 대답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후배가 픽, 하고 웃는 거에요.  혀를 내두를만치 탁월한 이론을 분석하고 집필했던 그가 그래요.

' 세계관, 사상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나는 형, 벌써 그만뒀어....내가 이 길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은, 투석을 하지 않으면 종이장 하나도 들어올릴 수 없는 몸으로도 그만 둘 수가 없었던 것은 형 때문이었어. 그때 고문 받으며 내가 내뱉었던 이름들,  빚진 마음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 그럽디다. 나는 정말이지 단 한번도 그 후배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그 후배 말마따나 그때 그 고문이 내 인생에 보탬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니까요 "

목소리가 메여 갈라졌다.

"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속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누구나 그렇게 빚진 마음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되었다구요. 저도 그래요. 김의기에게 빚진 마음이, 죽어서 의기 만나면 나 할 말 있다고 말 할 수 있기 위해서에요. 이 소선 여사도 그런 빚의 힘으로 살아오셨던 거구요.

만나면 노동자들이 저에게 그래요. 선생님 너무 감상적인 것 아녜요? 라고. 맞아요. 인정해요. 저 감상적이에요. 그런데, 그 힘이 저를 여기까지 끌고 왔어요. "


아, 저 사람은 진짜구나. 말과 삶을 한결같이 같이 하며 사는구나.  눈시울이 뜨거웠다.

빚진 마음. 달리 말하면 양심이고 최소한의 정의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예의다.
유구한 역사를 관통해온 민중들의 고난과 투쟁 그 피흘림으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지금 이 순간도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쪽의 안락함이 가능한 일. 나는 어떠한가. 창백한 손과 말로만 포장된 괴로움을 말해온 것은 아닌가. 무겁다. 무거움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자리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자는 제안에 괜히 손님이 끼는 것 같다는 그의 재촉에 인사도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래도 선생님께는 인사를 드려야겠다 싶어 거리에서 서성이는데 마침 오래지 않아 내려오셨다. 얼결에 선생님의 제안에 호프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지하철 타는 곳 방향이 같아 차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강연 중 쉬는 시간에 잠깐 서명을 받으며 했던 인사를 기억하고 물으셨다.


" 아까 우리가 10년전쯤에 만났었다고 했는데, 어쩐지 낯이 익다했어요. 그런데 어디에서 만났죠? "

" 9년 전 쯤 신촌 라이브카페에서 함께 술 마셨는데요. 시커멓고 흐느적거리는 음악나오는 곳에서요. 하하"

인터넷이 아직 일반화되기 전인 PC통신 시절 이야기가 나오고, 그때 게시판에서 읽었던 선생님의 중년일기를 이야기하자 얼굴 가득 웃음이시다. 신촌에서 만났던 기억을 더듬어 서로가 조각들을 꺼내어 이어지는 일화. 노동과 꿈 홈페이지에서 글 열심히 보고 있다는 이야기에 세상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웃는 선생님의 모습은 참 맑고 편하다. 꾸밈이 없어, 깊은 계곡 투명하고 정갈한 물 속 같다.  

바람 찬 거리를 돌아오는 길, 마음에 난로 하나 품은 듯 따뜻하다.
버스 뒷좌석에 앉아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꺼내 펼쳐본다.
책 안쪽 표지의 볼펜으로 쓴 글.

'노동자는 善이다!'

누군가 죽비를 내리쳐 때려주었으면 싶은 때, 그 핑계로 실컷 울어버렸으면 싶은 때.
든든하고 따뜻한 등에 기대어 위로받고 돌아온 착하고 순한 아이의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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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강연을 들으신 분 중에서 쓰신 글입니다.
하종강 선생님 홈페이지 노동과 꿈에서 '해가람'이라는 인터넷 필명을 쓰시는 분의 글을 퍼왔습니다.
원문 바로가기

2007/02/12 16:07 2007/02/1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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