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원문 http://www.voiceofpeople.org/new/news_view.html?serial=53921

본지는 지난 1994년 4월호, 이른바 ‘북핵 1차 위기’를 다룬 ‘미 CIA의 북한 핵정보 장사’기사를 통해 1989년 시작된 ‘북한핵과의 동침’이라는 UIP직배 전쟁영화가 ‘이제야’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고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기본합의서 채택을 끝으로 막을 내릴 줄 알았던 이 ‘영화’는 그 후 두번이나 더 ‘클라이막스’에 가까운 위기국면을 보여준 뒤 10년을 훌쩍 넘은 2006년까지 ‘장수 상영’하고 있다. 그리고 2006년 10월 현재 우리는 이 영화의 진짜 클라이막스를 맞이하고 있다.

한반도 핵문제의 태동은 한국전쟁 부터

한반도 핵문제는 한국전쟁 시기부터 태동됐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이미 한국전쟁 당시에 3차례에 걸쳐 핵폭탄 투하를 계획했었고 1958년부터 한반도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해 놓고 핵전쟁 계획을 수립했었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총사령관에 임명되자마자 원자폭탄 사용을 요구했고 그 후에도 30여발의 원자탄을 투하하면 10일 안에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맥아더는 사후에 출간된 회고록에서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동해에서 서해까지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 소련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계획은 완벽했다”고 기록했다. 2004년 12월 브루스 커밍스 교수도 프랑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지에 기고한 ‘북조선에서의 전화(戰禍)에 대한 회상’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휴전협정의 체결로 미국의 핵공격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으나 맥아더의 원자탄 공격 발언에 자극을 받은 북은 종전 뒤에도 미군이 한국에 북을 겨냥한 전술 핵무기를 배치하자 일찍부터 핵무기 개발계획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북은 인민군을 개편하면서 ‘핵무기 방위 부문’을 설치하고 1955년에는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하기도 했다. ‘살기 위한’ 북의 방어가 이때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이에 대해 북 외무성 대변인은 2002년 10월 25일 담화문을 통해 “조선반도의 핵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근 반세기 전부터 미국이 세계제패전략에 따라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추구하면서 남조선과 그 주변지역에 방대한 핵무기를 저축해 놓고 작은 나라인 우리를 핵무기로 위협해 옴으로써 산생된 문제”라고 강변한 바 있다.

북미 핵 공방 서막이 오르다

본격적인 북미 핵 공방은 1989년 9월 프랑스 스폿 인공위성이 북의 영변 핵시설을 촬영한 사진을 판독하면서 시작됐다. 지상 10m크기의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스폿 인공위성이 89년 9월에 찍은 사진과 86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핵재처리시설 특유의 길쭉한 직사각형모양의 핵관련 건물이 들어섰다는 것이 영변 재처리시설 존재의 핵심이유였다. 북은 85년 12월 NPT에 가입했지만, 가입 18개월 이내에 체결해야 하는 ‘핵안전조치협정’의 의무 이행을 지연시키면서 핵무기 개발 의혹을 사던 터였다. 핵안전조치협정 체결을 지연시킨 이유에 대해 당시 북은 “우리가 조약에 가입한 후에도 미국이 우리에 대한 핵위협을 계속 증대시킨 것으로 하여 우리는 조약에 따르는 담보협정을 체결할래야 할 수 없는 엄중한 사태에 직면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월간 말

영변 핵시설이 언론에 공개되자 미국은 북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고 점차 국제적인 압박을 구체화시켰다. 북은 영변 핵시설 문제가 불거진 89년 12월 부터 3차에 걸쳐 IAEA와 핵안전조치협정 체결을 교섭했는데 90년 2월 IAEA 정기 이사회에서 핵안전조치협정 체결과 사찰 수락 용의를 표명했다. 북은 이와 동시에 전제조건으로 남한에 배치한 주한미군의 전술 핵무기를 거론하면서 주한미군이 배치하고 있는 핵무기 철수와 미국의 핵위협 제거, 법적인 안전담보공약, 동시 핵사찰을 요구했지만 이 같은 제안은 ‘한반도 비핵지대화안을 관철시켜 남한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거’를 노리는 ‘책략’으로 인식돼 미국과 남한에 의해 거부됐고 북핵문제는 답보상태에 빠졌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북핵문제는 91년 9월 27일 당시 부시 대통령이 “지상과 해상 전술 핵의 폐기”를 선언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부시가 갑작스럽게 전 세계에 배치한 전술핵무기 철수, 폐기를 선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선언은 상당히 정치적인 선언으로 당시 구소련의 붕괴가 예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 붕괴로 이어지는 핵무기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해서 미국이 먼저 전술 핵을 폐기하고, 뒤이어 소련도 폐기하라는 식의 정치적 압력이었다.

어찌됐건 92년 11월 8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고 12월 13일엔 남북합의서가 31일에는 남북비핵공동선언이 고위급 회담을 통해 잇따라 합의됐다. 이 결과 92년 1월 7일 남한과 미국은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 중지를 공동으로 선포했고 22일에는 정전 이후 최초의 북미 고위급 회담이 뉴욕에서 개최됐다. 아놀드 캔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은 북 김용순 노동당 국제 담당 비서에게 “북한이 IAEA 일반사찰과 남북 핵사찰을 수용하면 미국은 상호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안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북한과의 고위급 회담을 계속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비록 부시 대통령의 핵 폐기 선언과 노태우 대통령의 핵 부재선언으로 북이 동시 제안한 주한미군기지에 대한 사찰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북은 일단 미국과 한국정부가 ‘말로라도 약속한’ 것에 만족하며 핵안전조치협정 체결조건과 환경이 조성된 조건에서 92년 1월 30일 IAEA와 핵안전조치협정을 체결, 31일 IAEA의 임시 사찰을 수용했다.

1992년 5월 23일부터 6차례에 걸쳐 북 핵시설에 대한 IAEA 사찰이 시작됐다. 그러나 사찰 후 IAEA는 북이 신고한 플루토늄 추출량과 관련해 의문을 제기했다. 북이 제출한 최초 보고서의 내용과 사찰 결과 간에 ‘중대한 불일치’를 발견했다는 것. 북은 최초보고서에서 5MW 흑연감속로 형의 실험용 원자로에서 1회에 걸쳐 80~90g 정도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IAEA와 미국은 사찰 결과와 미 첩보위성의 사진정보 등을 바탕으로 “북한이 최소한 3차례(89년, 90년, 91년)에 걸쳐 ㎏단위의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것”이라고 발표했고 이에 따라 93년 2월 25일 북이 신고하지 않은 시설 가운데 핵연료저장소로 판단되는 시설 2곳에 대한 사찰을 요구하는 특별사찰을 결의했다. 북은 “미국이 조작한 정보에 기초한 IAEA의 부당한 사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교전일방인 미국의 정탐행위를 합법화해 주는 것이며 미국의 핵위협을 항시적으로 받고 있는 우리의 특수한 조건에서 군사기지를 적에게 개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3월 9일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3월 12일 NPT탈퇴를 선언했다.

1994년 1차 핵위기

이 때부터 이듬해인 94년 6월 11일까지 정세는 급격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당시 남측에서도 전쟁위기설이 난무하면서 라면 사재기 등 극심한 혼란을 겪기도 했다. 북은 5월 29일 사정거리 1,300km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인 노동 1호를 발사 실험하면서 군사력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강경에는 초강경’이라는 북의 대미관계 원칙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첨예한 줄다리기 끝에 6월 2-11일 강석주 북 외교부 제 1부부장과 마주앉은 갈루치 미 국무부 정치 군사 담당 차관보는 북미 1단계 고위급 회담에서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 사용 불사용 및 불위협 보장 ▲비핵화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의 보장과 상대방 주권의 상호존중 및 내정불간섭 ▲한반도 평화적 통일 지지 ▲북 NPT탈퇴 잠정유보의 내용의 북미 1차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월간 말

이후 북미 간 회담이 계속되어 93년 10월 14일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취소하고, 북미 외교관계 수립 문제를 논의했다. 그리고 94년 2월 15일 북은 미국이 원하는 7개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수용하고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약속했다. 북미 1차 공동성명 이후 북 핵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듯했으나 북을 일시적으로 NPT에 묶어 놓았다고 판단한 IAEA과 NPT탈퇴 유보라는 ‘특수 지위’를 내세운 북은 ‘사찰 범위’를 놓고 또다시 마찰하기 시작했다. IAEA가 핵재처리시설로 지목한 시설에 대해 북이 군사시설이라고 주장하며 사찰을 거부하자 IAEA는 특별이사회를 개최해 북핵문제를 UN안보리에 회부하기로 결정하는 등 북을 압박했다.

94년 5월 북이 5MW 원자로에서 8000개의 핵 연료봉에 대한 추출을 진행하면서 북미 핵 대결은 정점에 치닫게 된다. 당시 IAEA와 미국은 북이 IAEA 사찰단의 입회 없이 핵 연료봉을 교체했다는 식으로 발표했으나 IAEA가 되려 북의 입회 허용을 거부한 사실이 북의 폭로로 밝혀지기도 했다. 북은 동력기술공정상 연료봉을 교체하지 않을 경우 체르노빌 참사와 유사한 핵 누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핵 연료봉을 교체해야 했다고 강변했으나 국제사회 여론은 북이 ‘추후 계측’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핵 연료봉을 교체했다고 북을 몰아 부쳤다. 6월 10일 긴급 소집된 IAEA 특별이사회가 북에 대한 제재조치를 결의했고 이에 반발한 북이 13일 IAEA에서 탈퇴하는 강수를 내던지면서 1994년 6월 전쟁위기는 최고조에 이르게 됐다.

미국은 영변 핵 폭격 계획을 수립했지만 당시 미국은 북에 대한 폭격을 쉽게 감행할 처지가 못 됐다. 94년 5월 진행했던 모의핵전쟁실험에서 최초 3개월간 미군 사상자 5만 2천명, 한국군 사상자 49만 명 등 경악할 만한 피해 결과가 나오자 미국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에 파견해 협상여부를 타진했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과 지미 카터 사이에 면담이 성사되면서, 핵문제 해결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보게 됐다. 이 과정에서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북미 3단계 회담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한달 여 뒤 재개됐고 우여곡절 끝에 10월 17일 북미 제네바 핵협상이 타결됐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1차 북미 핵 대결은 94년 10월 21일 △북의 흑연감속로를 미국은 경수로로 대체해 주고 △대신 북은 50MW급 원자로와 200MW급 원자로 건설을 중단하고 재처리를 하지 않으며 방사화학실험실을 폐쇄한다 △양국은 관계정상화를 위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무역투자 장벽을 완화해나가며 △미국은 핵 선제 불사용에 대한 보장을 하고 북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 한다 △북은 NPT 회원국으로 잔류하며 NPT에 따르는 핵 안정협정을 이행 한다 △미국은 북에 연간 50만 톤의 중유를 제공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제네바 기본합의서’ 도출로 마무리됐다.

미국의 ‘대패’로 끝난 금창리 해프닝

90년 초반 1차 북 핵 위기가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도출했다면 이른바 ‘금창리 핵개발 의혹’으로 시작된 98년 북미 대결은 ‘페리 보고서’를 이끌어 냈다.

98년 8월 초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북의 금창리 지하시설 공사문제를 들먹였고, 이어서 <뉴욕 타임스>는 북의 지하시설 공사문제가 제네바 합의의 파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금창리가 언론지상에 떠돌자 워싱턴 정가가 들썩이기 시작했고 대북 강경파들은 이른바 ‘금창리 핵시설’은 북이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는 증거라며 대북 제재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북은 곧바로 8월 31일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 발사장에서 ‘광명성 1호’라는 인공위성 발사 실험을 전개했다. 광명성 1호 발사는 미국에게 두 가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곧 붕괴되리라 의심치 않았던 북이 과학기술과 군사력을 세계에 과시했다는 것, 그리고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쏠 수 있는 미사일 보유 가능성이었다.

광명성 발사이후 워싱턴 정가에서는 북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들 강경파는 금창리 굴착공사를 핵개발 의혹과 결부시키면서 제네바 합의 무용론과 대북 전쟁 불사론을 주창하기 시작했고 선제공격을 명문화한 ‘5027-98’ 작전계획을 언론을 통해 유포시키며 북에 대한 협박을 강화했다. 그러나 북은 반응은 더욱 강경했다. 북은 12월 2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선제공격은 미국만의 독점물이 아니”며 “인민군대의 타격을 피할 자리가 이 행성 위에 없다”고 경고했다. 북 국방성 부상 전창렬은 다음날 “미제가 끝끝내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단다면 우리 인민군대는 미국 본토를 통째로 날려 보내겠다”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대미 비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미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대변되는 북의 광명성 1호 발사를 목도한 미국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주일 미국 대사 훠리는 12월 14일 기자회견에서 “북이 지하 핵시설 의혹 사찰을 계속 거부한다 하더라도 조미 합의가 깨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으며, 1999년 1월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 코언 미국방장관도 기자회견에서 대북 선제공격을 부정했다.

때마침 북은 미국의 금창리 사찰 요구를 수용했다. 단, ‘관람’에 대한 ‘관람료’를 지불하라는 조건이었다. 마침내 북-미 양국은 99년 3월 금창리 핵시설 의혹 해소와 관련한 합의를 했고, 5월 18-25일 미국은 3억 달러 상당의 식량을 ‘관람료’로 지불하고 금창리를 방문한 후 핵 의혹이 없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갔다. 한반도를 전쟁위기 국면으로 몰아가던 금창리 사건은 결국 해프닝에 가까운 미국의 어이없는 ‘대패’로 마무리 된 것이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대북정책 전반을 조정하는 조정관으로 임명됐던 페리 전 국방장관은 그 즈음 북을 방문해 고위관리들을 만나 핵과 미사일 폐기 시 북이 얻을 대가로 미국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성명하고 이를 논의할 북 고위 관리의 방북을 요구했다. 페리 조정관은 미국으로 돌아가서 국회에 이러한 내용을 보고했고, 이 것이 그 유명한 ‘페리 보고서’이다. 페리 보고서는 단기적으로 북은 미사일 발사를 중지하고 미국은 적절한 제재 완화 조처를 취함으로써 상호 위협 감소를 통한 포괄적으로 통합된 접근을 추진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99년 페리 보고서로 유화된 북미 대결 국면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그해 10월 조명록 차수의 방미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 그리고 북미 공동코뮤니케 발표를 이끌어내면서 북미관계 개선의 단초를 마련했다.

부시 행정부의 출범 이후 깨어진 북미 평화국면



△조미공동코뮤니케 발표 이후 잠시잠깐 조성됐던 북미 간 평화국면은 부시 행정부의 출범 이후 깨어지고 말았다. ⓒ월간 말

그러나 잠시잠깐 조성됐던 북미 간 평화국면은 부시 행정부의 출범 이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2000년 말 대북 강경 노선을 내세우며 등장한 부시 대통령은 ‘대북정책 전면 재검토’를 주장하더니 2001년에는 북을 ‘테러 지원국’으로, 다시 2002년 1월 29일 연두교서에서는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전면적인 대북적대정책으로 전환했다. 2001년 9.11 사건이후 반테러,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을 정책 1순위로 정한 부시 정부의 강경입장은 2002년 3월 ‘핵 태세검토보고서’에서 북을 핵 선제공격대상국으로 명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한편 미국은 지난 98년부터 북이 우라늄 농축을 통한 비밀 핵 활동을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미 CIA는 2001년 후반기 정보보고를 통해 북이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기 관련 물질 등을 찾고 있었고 우라늄 농축 관련 장비들을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2002년 7월엔 북이 연간 2개 이상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우라늄 농축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고 평가한 미국은 10월 3일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를 특사로 북에 보냈다. 켈리 특사는 김계관 북 외무성 부상과의 회담에서 미국이 수집한 정보를 들이대며 핵개발 시인을 종용했다. 다음날 회담장에 나온 강석주 외무성 제 1부상은 대북강경정책 철회를 요구하며 “우리는 핵무기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발언은 곧 “북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했다”로 왜곡됐고 곧 11월 14일 KEDO집행 이사회는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따라 북에 제공하기로 한 12월 분 중유공급 중단방침을 발표했다. 또 12월부터는 실제 중유공급을 중단했다. 이에 북은 12월 12일 조선외무성대변인 담화를 통해 ‘핵시설들의 가동과 건설을 즉시 재개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중유제공은 원자력발전소들을 동결하는데 따르는 전력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미국이 취해야 할 의무사항인데 미국이 이를 포기해 당장 전력생산에 공백이 생겼으니 동결했던 핵시설을 재가동 한다는 것이었다.

동결된 핵시설은 지난 94년 제네바 기본 합의서에 따라 동결시켰던 영변 핵시설을 의미했다. 곧바로 북은 12월 21일부터 핵시설을 재가동시키면서 IAEA 사찰관을 추방시켰고 2003년 1월 10일에는 아예 NPT를 탈퇴해 버리면서 한반도 위기 지수가 또 한번 급등했다. 미국 내 강경파를 중심으로 대북 군사옵션 채택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심각한 국면으로 치달았던 2003년 2~3월 고비를 넘기면서 그 해 4월 23일 베이징에서 북-중-미 3자회담이 개최되면서 고비를 넘기게 됐다. 그 해 8월부터 6자회담이 본격화되고 이듬해 2월과 6월 세 차례 6자회담이 열렸다.

또 하나의 돌파구, 9.19 공동성명

2005년 2월 10일 북은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우리 공화국을 적대시하고 기어이 고립 압살해 보려는 2기 부시 행정부의 기도가 완전히 명백해졌다”며 6자회담의 무기한 불참과 핵 무기고를 늘릴 것을 선언했다. 한편으로 북은 3월 3일에는 외무성 비망록을 통해 “부시 2기 정부가 성의를 보이고 행동해 6자회담이 개최될 수 있는 조건과 명분이 마련할 경우 언제든지 6자회담에 나가겠다”고 밝혔다.



ⓒ월간 말

2005년 9월 19일 제4차 2단계 6자회담을 통해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등의 내용이 담긴 9ㆍ19공동성명을 만들어냈지만 공동성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미 재무부는 북이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를 통해 위조달러 지폐를 유통시키고 마약 등 불법 국제거래대금을 세탁한 혐의가 있다며 BDA를 ‘돈세탁 우려대상’으로 지정하고 북 계좌에 있는 2천400만 달러를 동결시켰다. 사실 미국의 이러한 조치들은 공동성명 발표 후 비공개로 열린 마지막 마무리 발언에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위폐와 인권문제, 생화학무지, 테러리즘 등에 대해 강력하게 지적하고 나설 때부터 예고됐었다.

북의 반발은 당연했다. 11월 베이징 제5차 6자회담에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BDA조치를 풀라’고 요구했지만 힐 차관보는 ‘불법 활동에 대한 정당한 법 집행’이라고 거절했다. 이후 북미 양측의 대결구도를 완화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12월 제주도에서 비공개 6자회담을 제안했으나 북측의 거부로 무산됐다.

2006년 1월 18일 북과 미국, 중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들은 베이징에서 회동했으나 ‘선(先) 금융제재 해제’를 요구하는 북과 북의 ‘아픈 곳’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3월 7일 북미 양국은 뉴욕에서 금융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실무적 접촉’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북은 위폐문제 해결을 위한 정보교류와 합동 협의기구 설치를 제안했지만, 미국은 ‘불법행위는 협상대상이 아니다’며 북의 제안을 일축했다.

깨어진 협상, 본격화된 ‘힘’대결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부 장관 ⓒ월간 말


4월 중순 도쿄에서 열린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는 북미 접촉이 재개될 또 하나의 기회였다. 그러나 북측의 김계관 부상이 미국과의 대화에 시종일관 적극적이었던 것에 반해 힐 차관보는 김 부상을 철저하게 외면했고, 6월 1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힐 차관보를 초청해 대미 직접대화 의지를 보였으나 미국은 “북과 접촉할 계획이 없다”며 이 마저도 거부했다.

금융제재는 북미 평화공존과 관계정상화를 뒤엎은 행위라고 판단한 북은 결국 7월 5일 미사일을 실험 발사했고 7월 15일에는 유엔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는 대북결의안이 채택됐다. 북 미사일 발사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수위를 더해가자 북은 10월 9일 핵실험을 단행했다. 북 외무성 대변인은 핵실험 성공 이틀 후인 11일 담화문을 내고 “미국에 의해 날로 증대되는 전쟁위험을 막고 나라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부득불 핵무기 보유를 실물로 증명해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면서도 “대화와 협상을 통한 조선반도의 비핵화 실현의지에는 여전히 변함없다”고 밝혔다.
2006/11/01 18:22 2006/11/0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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